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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이고 소탈했던 한 신부님에 대한 기억 | 2009/08/06 02:19



<내 기억 속의 신부님>. 지난 2007년 예수원에서 나온 책이름이다. 책은 예수원 설립자였던 고 대천덕 신부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놓고 있다. 

대천덕 신부 5주기를 맞아 펴낸 책에는 1957년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온 미국인 선교사가 수도원 공동체 예수원을 설립하고, 평생을 산골짜기에 살며 보였던 모습이 담겨 있다.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시선으로. 

대천덕 (Reuben Archer Torrey 3세). 1918년 1월19일,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출생한 대천덕 신부는 1957년 한국에 들어와 1940년 신사참배 반대 및 정치적인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됐던 聖미가엘 신학원을 재건한다. 1964년까지 그는 원장으로 봉직하며 학교를 안정시켜 놓는다. 

그가 재건한 성 미가엘 신학원은 지난 6월 노무현 대통령 추모 콘서트 '바람이 분다’를 열었던 지금의 성공회 대학교다. 

성공회대 재건 후 태백에서 예수원 설립 

1965년 그는 태백으로 들어가 예수원을 설립한다. 12명의 사람들과 함께 천막을 지어놓고 생활하며, 그가 구상했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구상했던 예수원은 실험실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실제적으로 현실에서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던 것. 그는 실험을 통해 성경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함께 하던 사람들이 떠나갔고 음식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 다시 오고, 먹을 것이 생겨나며 그는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오직 성경적 원칙에 근거한 방법을 통해서. 

지금은 예수원이 연간 1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한국의 대표적 공동체로 불러지고 있지만, 이를 위해 그는 쏟은 열정과 노력은 예수원 곳곳에 배어 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원을 자신의 절대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자청해 2선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며, 말년에는 설립자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사회의 불의와 교회의 잘못을 지적했던 대천덕 신부 

토지문제는 그가 생전에 가장 중요시 여기며 강조했던 사안이었다. 사회의 불의와 교회의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던 그는 경제 문제에 있어 토지의 중요성을 줄곧 이야기 했다. 그는 부동산 투기를 죄악이라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84세이던 2002년 8월 6일 대천덕 신부는 영면했지만 그의 정신과 자취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70~90년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산골짜기를 찾았고, 지금도 그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교회갱신과 토지정의를 외쳤던 그의 정신은 지금도 이 사회를 향한 외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대천덕 신부님 

<내 기억 속의 신부님>에 담긴 대천덕 신부님의 모습은 평범한 할아버지에서부터 영성 있는 목회자, 진보적 경제학자 등 다양하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을 만큼 그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언제나 순수하게 낮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상대했던 대천덕 신부님의 모습을.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


 



절대 땅 투기 안 합니다. 

대 신부님께서 늘 강조하시던 말씀 중 특별히 마음 속 깊이 새겨진 말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말씀은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여러분 땅 투기 하면 안 됩니다. 토지개혁을 실천한 나라가 잘 살게 됐습니다.” 

두 번째 말씀은 “성경에 고아원 양로원 세웠다는 말씀없습니다. 고아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돌보고 도와줘야 합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실험실입니다.” 

대 신부님의 말씀을 들은 지 2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도록 이끄셨다. 기회도 있었고 주위에서 설득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 신부님, 절대로 땅 투기 안합니다!’  이옥연 / 목사 사모 


정의와 종교는 분리되지 않는다 

대 신부님께서 펴내신 책<토지와 자유-성서의 경제학>을 읽었다. 대 신부님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좋은 목적을 같이 나누고 싶기도 해서 혹시나 하고 편지를 한번 보내 보았는데, 예기치 않게 프레드 해리슨의 토지의 힘 복사본과 함께 답장(1985.4.20)을 보내 주셨다. 대 신부님이 구술하시고 누군가 대필한 편지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사실 성경에서 그대로 읽기만 하면 사회질서와 정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얘기했듯이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세력 잡은 이들이 이런 것을 가르치지 말고 영적인 해석을 하자고 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무효가 되었습니다. 또 일반 신학교에 가면 현대 사회 문제를 볼 때 그렇게 된 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이 아직 성경 말씀대로 믿습니다.” 

토씨 구사와 표현이 다소간 어색한 서양인 특유의 말씨였지만 정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김윤상 / 경북대 교수 


"부처님 생일 축하합시다!" 

주일 미사 설교시간이었다. 신부님께서 설교 첫 말씀을 이렇게 하시는 것이었다. 

“오늘은 부처님 태어나신 날입니다. 생일 축하합시다.” 

아니 이게 무슨말? 나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말씀을... 신부님께서 말씀을 다 마치고 나서도 내게는 그 첫 말씀이 뇌리에 남았다. 

그런데 왜 자꾸 나는 그런 신부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그 분의 포용력을 떠올리게 되는 것일까? 나도 그런 마음을 소유하고 싶다. 신현민 / 예수원 회원 


초기 예수원 가족들과 함깨. 왼쪽에서 두번째가 대천덕 신부




대 신부님 통해 연구자로 운동가로 

나는 신부님을 1991년 12월에 만났다. 몇 가정과 함께 예수원을 방문했는데, 신부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신 중에도 우리를 댁으로 초대하셔서 다과를 대접해 주셨다. 우리 중 몇 사람이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것을 아시고 기뻐하시며 서재에서 두꺼운 책 몇 권을 갖고 나오셔서 우리에게 주셨다. 그 책은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영문판이었다. 

나는 그 때 그 책이 얼마나 귀중한 책인지 모르고 집에 돌아와서 책꽂이에 그냥 꽂아 두었다. 그 후 성경적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진보와 빈곤을 열심히 읽었고 이제 헨리 조지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연구자, 그의 대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가가 되었다.  전강수 / 대구 카톨릭대 교수 


"저는 아직도 예쁜 여자를 조심합니다." 

한 청년이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다가 예수원을 찾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신부님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신부님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청년은 감사한 마음으로 상담에 임했다. 최근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말씀드리자,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저는 아직도 예쁜 여자를 조심합니다." 

당시 신부님은 여든이 넘은 나이였다. 이금수 / 예수원 회원 


"식사 시간에는 불러 주시오!" 

예수원에서 몇 차례 호칭문제로 몸살을 앓은 적이 있다. 결론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 안에 비성경적인 계급 정신을 깨뜨리고 형제적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성직자를 포함해 모두를 ‘형제자매’로 부르기로 한 것이었다. 직임이나 나이를 떠나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되 그리스도 안에 한 지체로서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처음 이 것을 시행할 때는 우리 문화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인지라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특히 대 신부님을 어떻게 호칭할 것인가 하는 것이 뜨거운 감자였다. 평소에 공동 결정에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던 신부님은 우리가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못 들은 척하시기도 했고, 어느 날 부터는 가슴에 ‘아처 형제’라고 이름표를 달고 다니며 자신을 그렇게 부르도록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셨다. 

형제 자매라고 호칭한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때로 손님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고, 우리 안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서 한 형제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면서 질문을 하자, 신부님을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미국에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나를 형제라고 불러도 좋고, 신부라고 불러도 좋은데... 아무튼 식사시간에는 꼭 불러 주시오!” 
“.....”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이 없었지만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많았던 신부님 아니 아처 형제님의 유머가 그리워진다. 권요셉 / 예수원 회원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타협하지 않으셨던 분 

99년 심장병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두 달간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실 때 주치의이셨던 린튼 박사님께 고단백음식을 섭취하셔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받으셨습니다. 저도 린튼 박사님으로부터 전화상으로 직접 주의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양질의 영양 섭취를 위해 예수원의 주방장을 비롯해 관계된 부서의 여러 형제자매들이 머리를 짜내며 고심했습니다. 일단 집에서 식사하시도록 하고 식사는 몇 명이 순번제로 돌아가며 섬겨드렸습니다. 예수원 공동체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갖다 드리면 신부님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얼마쯤 그러시다가, 신부님이 이제 식사를 그만 가져오라고 공동식사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운신을 하실 만하니까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는 것이었지요. 이 때부터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공동식사에 나오셔서야 비로서 신부님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신부님의 밥에 고기를 깔고 그 위에 밥을 얹어드렸는데, 고기를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고 당신은 몇 점만 드실 뿐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타협하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유테레사 / 성공회 사제


예수원에 있는 대천적 신부님의 작은 묘비





그의 생전에 예수원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고, 그를 찾는 사람 중에는 대천덕 신부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예수원에 나를 보러오지 말라. 나는 볼 것이 없는 사람이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러 와라. 그리고 내게는 제자가 없다. 대천덕의 제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 대천덕 신부. 그의 7주기를 맞는 오늘 그의 정신이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