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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간송 전형필', 성북리 보화각이 주던 전율 | 2011/01/23 14:06

■ 프롤로그 - 미술관이 준 무게감 
무작정 찾아간 성북리 보화각, 간송미술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지난해 10월의 마지막 주말에 한 전시회를 보고 온 적이 있다. 장소는 성북리의 보화각. 지금 지명으로 말하면 성북동 간송미술관이다. 그런데 전시회 하나 보고 온 이야기를 쓰려고 한 것이 쉽지가 않았다. 간송미술관이 주는 무게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해를 넘겨서야 그 이야기를 정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사실 그 곳을 처음 찾아갔었던 것은 2010년 7월의 무덥던 어느 날이었다. 그냥 무작정 찾아갔는데, 전시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공간이라 겉모습만 잠시 둘러보고 내쫓기듯 되돌아 와야 했었다. 전시회 때만 들어올 수 있다며 관리인은 건물 주변을 구경하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야트막한 흰색 건물 주위로 돌 조각상, 탑 등이 보였다. 한 점 한 점 세밀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의미를 알지 못했다면 일부러 찾아가지도 그것들을 그리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것인데,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7월이 살짝 훔쳐보기와 같았다면 10월은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1년에 단 두 번만 열린다는 전시회. 10월의 전시회를 놓쳤다면 다음해 5월까지 기다렸어야 했을 것인데, 그러기가 힘들어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7월의 아쉬움이 만만치 않았기에…


■ 간송과의 만남 - 흉상 앞에서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리 사실 수 있었는지요?" 



간송미술관에 있는 전형필 선생 흉상

모든 게 다 책 한 권 때문이었다. 인사동도 아닌 성북동으로 없는 시간을 만들어 미술관 나들이를 했던 이유가. 

<간송 전형필>, 그 책이 아니었다면 굳이 옛 성북리 보화각을 그리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제대로 알지 못하고 흘리듯 지나쳐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과연 그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간송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을까? 

지난 3월 막 출간된 저자의 친필이 든 따끈따끈한 책을 받아 들고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간송’과 ‘전형필’은 들어봤는데, ‘간송=전형필’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큰 관심이 없었던 게 이유였다. 간송 전형필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둘 쌓이며 궁금증이 서서히 자극됐는데, <간송 전형필>은 그것을 깔끔히 해소시켜 줬다. 

책에서 전해져 오는 감흥과 감동, 그리고 흥미진진한 역사속의 이야기. 책은 재밌게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진득하니 묵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도자기가 불가마에 몇 번을 구워지듯 몇 번을 더 음미해야 책이 맛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적어도 간송미술관을 갖다 오지 않고 그 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왠지 예의가 아닐 듯했다. 

그러는 사이 책을 두어 번 더 읽었다. 사전을 찾듯이 이 부분을 확인하고 저 부분을 뒤적이면서. 그러다보니 일제 강점기 독립된 조국을 생각하며 역사의 유산을 지키려했던 한 거부의 모습이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반발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일본 신사에 있다는 조선 왕실 유물에 대한 소식을 접하며, 그때마다 나는 간송 전형필이 떠올랐다. 간송 같은 분이 몇 명 더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문화재가 외국을 떠돌지 않고 오롯이 우리 앞에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 이충렬은 간송의 흉상 앞에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써 보겠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간송의 흉상 앞에서 물었다.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셨습니까? 어떻게 그리 사실 수 있었는지요?"


■ 전형필 - 이 땅 문화 예술의 선각자 
재산 팔아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내다
 



“서화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스승 오세창의 물음에 간송의 대답은 간결했다. 20대의 젊은 나이,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각오도 단단했다. 부의 축적도 아니었고, 그저 단순한 수집 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택한 길이 아니었다. 유구한 역사로 흘러 내려온 조선의 혼을 지켜내겠다는 것이 서른이 되기 전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전형필의 다짐이었다. 

끊임없이 수탈당했던 암울한 식민지 조선. 쌀을 빼앗겼고, 문화재를 도굴 당했다. 조선의 재산은 이 땅을 떠나 먼 나라 이방인들의 손으로 흘러 다녔다. 볼모로 잡혀가듯 외국을 떠돌있다. 힘없이 나라를 뺏긴 마당이었으니 유물마저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조선의 보화들은 그것을 몰래 캐낸 일본인의 눈을 만족시켰고, 다신 눈독 들이는 외국인들의 손에 넘어가며 뿔뿔이 흩어졌다. 

간송이 젊은 나이에 집안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부자가 된 것은 어찌보면 타고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으로 말해 재벌가의 상속인이 된 그는 이 나라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뜻있고 가치 있게 돈을 썼다. 틈나는 대로 중요한 문화재를 사 들였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였다 한들 엄청난 거금이 들어가는 일이었기에 때때로 간송이 망설임 또한 없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지금 돈으로 수십 억 원을 투자해 한 점의 도자기를 사는 것이었고, 때로는 수 백 억을 넘어 수 천 억 원을 들여 유물을 사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어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그렇지만 이 땅에 꼭 남아야 할 물건이라면 그는 거금을 들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당장에 처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좌절하기 보다는 독립된 나라로 우뚝 서는 미래를 생각했던 바탕 덕분이었다. 언젠가는 일제의 손에서 벗어날 조국. 그 순간을 기대하며 재산을 쏟아 부었고, 그의 다짐대로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낸 것이다. 

불쏘시개 될 뻔한 겸재, 조선 백자가 된 참기름병 

성북리 북단장과 보화각, 지금의 간송미술관은 그런 각오가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적당히 음미하다 되파는 것이 아닌 자손대대로 이어지길 바라는 만든 최초의 박물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수집과 함께 전시 공간 마련, 간송은 이 땅 문화예술의 선각자였다. 

그가 돈과 사람을 풀지 않았다면 혜원 신윤복의 화첩이 이국땅을 맴돌았을 것이며, 겸재 정선의 화첩은 불쏘시개로 전락했을 것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귀중한 유물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비롯한 진귀한 보물들이 이 땅에 남아 있기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들이 모아져서 많은 사람들의 눈 호강을 하게 된 것은 모두가 간송의 깊은 마음 덕분이었다. 

아무리 귀한 유물인들 당시 시대상에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위협을 무릅쓰고 사회주의자에 거액의 돈을 주며 사들일 수 있었을까? 그것도 상대가 원하던 이상의 돈을 주고서. 간송의 대범함과 우리 문화에 대한 욕구가 없었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음 씀이 넉넉했던 간송은 가치 있는 일을 한 사람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택에 귀중한 보물이 간송이 수중에 들어왔고, 긴 세월이 흘러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선물을 안겨준 것일 게다.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별 볼 일 없던 참기름 병이, 아는 사람들 눈에 띄어 몇 십 억대의 가치를 지낸 조선 백자로 변하는 모습이 재밌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간송의 모습은 흥미진진하다. 영국 수장가가 소유하고 있던 20여점의 청자를 위해 수 천 억 원을 쏟아 부었던 간송의 의지에는 커다란 경외감이 느껴진다. 

비록 일제 치하에서 비록 총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독립될 나라를 위해 민족혼을 일깨우며 자신의 재산을 의미 있게 활용한 간송이 삶은 나름 의미 있는 독립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천년의 세월을 넘어 온 공민왕의 그림과 신사임당이 남긴 자취를 보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아마도 역사를 이어져 내려오던 문화가 주는 특별한 감흥 때문이었으리라. 해방된 조국의 문화유산을 지켜낸 그의 삶에 한없는 존경심이 솟아오르며 오늘도 간송의 삶을 뒤적여 본다. 그리고 또 다시 물어본다.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셨습니까? 어떻게 그리 사실 수 있었는지요?” 


■ 작가 이충렬 선생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근대> 출간 예정...35년만에 백수돼 



작가 이충렬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가 <한겨레21> 초창기 미국 통신원으로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미국뿐만 아니라 북한도 몇 차례 드나들며 그곳의 모습을 전했는데, 그 때부터 이충렬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게 됐다. 

오마이뉴스 블로거 모임을 통해 그를 만나게 됐고, 그의 블로그를 훔쳐보며 그가 나눠주는 그림과 예술에 대한 지식을 감사히 받아 먹고 있다.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는 2008년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이란 책을 펴냈다. <간송 전형필>은 뒤를 이어 나온 책이다. <간송 전형필>은 ‘2010 교보문고 역사문화 부분 베스트셀러’ 8위를 기록했고, ‘yes 24 올해의 책’ 투표에서는 문학부분 18위를 차지했다. 동아일보와 매일경제가 선정한 '2010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집필 중인 또 다른 책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근대>(가제)는 올해 출간될 예정이다. 

작가 이충렬은 미국 아리조나에서 잡화 가게를 경영해 왔다. 1976년 11월 21일 무거운 이민가방을 끌고 김포공항을 떠나 일을 안 한 날이 거의 없었다는 그는 최근 ‘35년 만에 백수가 됐다’고 한다. 불황의 여파를 견디지 못해 가게를 정리했기 때문이란다. 

이제는 책상 앞으로 출근해 글쓰기에 전념할 예정이라는데, 6년 뒤 연금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 인세로 일용할 양식을 해결할 수 있다면 ‘땡큐가 베리 마치’란다. 알기 쉽고 재밌게 문화적 유산의 의미와 가치를 편안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그의 능력을 볼 때, 장사보다는 글 쓰는 일이 제격이 아닐까 싶다. 

<간송 전형필>은 그가 원고를 마무리할 때쯤 심장 이상으로 쓰러져 하마터면 유작이 될 뻔했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 계속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덕분에 그의 재밌는 글을 계속 읽을 수 있고, 앞으로 펴낼 책에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독자로서 느끼게 되는 행복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눠주는 풍부한 그림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이 블로그를 찾아가면 된다. 
http://blog.ohmynews.com/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