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빨치산의 딸
임채진 검찰총장은 2일 서울 대검찰청에서 열린 ‘검찰 신년 다짐회’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면서 친북좌익 이념을 퍼뜨리고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 총장은 신년사를 통해 “올해는 경제정책과 관련된 노사분규나 불법 집단행동이 대폭 증가할 것”이라며 “노사분규에 대해 불법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제 대응하고, 불법이 발생한 후에는 불법필벌의 원칙을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불법과 폭력으로 얼룩진 촛불집회가 우리 사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은 경제난 타개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도 말했다.
-경향신문 기사 중
일개 필부가, 아무 힘없는 평범한 소시민이 지엄하신 검찰총장님의 말을 우습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또다시 친북좌익 어쩌고 하는 말이 가소로웠다. 21세기로 들어선지 10년이 다 돼 가는 지금도, 사회주의 종주국 러시아 중국 등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갖고 있는 지금도, 냉전적 사고 방식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91년 공안 정국이 번뜩 떠올랐다. 저항이 거세질 때면 언제나 전가의 보도처럼 나오는 친북좌익세력 척결. 촛불집회도 불법과 폭력으로 얼룩졌다고 말하는 태도를 보며 한심스러웠다. 국민 건강권과 나라를 똑바로 운영하라는 국민의 정당한 외침이 저들 눈에는 불법 폭력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것 같다. 개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쯧쯧쯧.
촛불만 들었다고 연행하고, 개인물품 파손한 경찰에 항의만해도 연행하고, 너무한다고 경찰서 앞으로 항의하러 간 사람들도 또 연행하고,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자행하는 경찰의 불법 폭력적인 행동은 아예 눈에 안 보이는 모양이다. 4.19가 먼 옛날 이야기로만 생각되는걸까? 6월 항쟁이 20년전의 한 사건으로만 느껴지는걸까?
4.19나 6.10이 그저 역사의 이야기만은 아닌데...
'빨치산의 딸' 정지아 선생 지난 연말, 밀린 일을 해치우는 기분으로 구입해 읽고 있던 <빨치산의 딸> 2권을 검찰총장의 발언을 들으며 그날 다 읽어 버렸다. 원래는 틈틈이 조금씩 읽으려 했던 것인데, 검찰총장님의 말이 부화를 돋운 통에 밤새워 남은 분량을 다 읽고 말았다. 90년대 '국가보안법'에 저촉됐던 책이었기에.
<빨치산의 딸>은 1990년 처음 발간됐고 제법 잘 팔리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판매금지처분을 당했던 책이다. 당시 책을 낸 출판사 사장은 실형을 선고 받았고, 스물네살이던 작가 정지아 선생은 이미 다른 일로 수배중인 상태였다. 출판사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은 정보기관이 빼앗아 갔다.
<빨치산의 딸>은 정지아 선생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출신 유혁운(본명 정운창) 선생과 남부군 정치위원 출신 이옥자(본명 이옥남) 선생이 온갖 아픔과 고통속에 딛고 치열하게 싸웠던 한국전쟁 전후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절판됐던 책은 2005년 5월 다시금 세상으로 나왔고,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생각만 하고 있다가 뒤늦게 구입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샀던 것은 91년이었다. 구미로 내려가 있을 때 친한 친구의 의식 확장을 위해 대구의 한 서점에서 생일 선물로 구입해 보냈었고, 나중에 빌려 읽으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빌리려 했을 때는 친구가 세권으로 나온 책 중 2권을 잃어버린 상태. 절판된 책을 구하기도 어려워 아쉬움만 갖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손에 쥐었을 때 더욱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잠 안자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불굴의 의지로 굽힘없이 살았던 사람들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정운창 선생. 지난해 5월 옛 동지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 ⓒ조성봉
이현상 선생을 위해 올리는 제를 바라보고 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 이옥자 선생 / ⓒ조성봉 생사의 갈림길에서 수없이 고비를 넘으며 살아온 책의 주인공 두 분의 이야기는 가슴 뭉클했다. 친일 민족 반역자들에 맞서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와 외세에 의해 겪게 되는 좌절. 가족을 잃고 아이를 잃고 동지를 잃으며 고난으로 이어지는 세월. 불굴의 의지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으면서도 신념을 잃지 않으려던 빨치산들의 모습속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격동을 시대를 지나온 그들의 험난했던 삶이 딸의 글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정운창. 1928년 구례 문척면 출생. 철도학교를 졸업했으며 철도노동자로 일했다. 유혁운이란 이름을 사용했으며 1948년 5.10 단선 이후 야산대를 거쳐 유격투쟁 대열에 참가했고 주로 백운산 지역에서 활동(특각 비서과장)했다. 그 뒤 봉두산, 백아산(지구 부책)을 거쳐 6.25 뒤 도당 노동부 지도위원으로 일한다.
전시 평양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후퇴과정에서 다시 입산. 재산 활동 중 곡성군당위원장, 도당 조직부 부부장(봉두산 분트책)을 지냈다. 그 뒤 지하활동을 위해 하산 활동 중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4.19 직후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도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한 시대의 역사를 몸으로 기록했으며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이옥자. 1926년 생. 1943년 18세 되던 해 최규복과 결혼했다. 최윤호로 불렸던 남편 최규복은 이현상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한국전쟁 기간 중 낙동강 도하를 위해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47년 7월 구례 광의면 여맹위원장이 됐고, 48년 아들 출산 후 여순사건을 주도한 세력들과 함께 지리산에 입산했다.
49년 빨치산 활동 중 아들을 잃었고, 시아버지는 경찰에 총살당했으며 시동생들도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50년 남부군 정치지도원이 되어 지하활동을 목적으로 경남도당으로 옮겨가던 53년까지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선생을 보좌한다. 54년 4월 환자트에서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하산하게 된다. 이후 정운창 선생을 만나 동지로서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살아간다.
인간답고 평등한 더 나은 세상을 바란 그들의 신념
그들은 굳게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목숨을 내 걸고 지켰던 신념은 바로 인간답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람다운 세상. 정지아 선생은 책 서문에서 그들의 신념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 한국 현대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목숨까지 걸게 했던 '사회주의'는 이미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고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 쿠바 정도가 사회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더이상 사회주의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사회주의' 란 소련이나 중국으로 대표되는 어떤 제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 을 가리키는 추상명사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동물이므로, 사회주의가 사멸했다고 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더 나은 어떤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옛 사람들의 기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종종 빨치산 관련된 책을 읽으며 들었던 이름이기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악조건을 이겨내며 살아온 빨치산 전사들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을 통해 그 이름없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느꼈을 때처럼.
산중에서 사라져간 이현상, 박영발, 방준표, 김선우, 박종하, 이진범, 양봉순, 최규복, 조용수, 오금일 등등. 그리고 이름없이 사라져 간 빨치산들. 그리고 그 역사를 증언한 책의 주인공 정지아 선생의 부모님인 정운창, 이옥자 선생님.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뜨거운 동지애로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굳건한 신념 하나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인간이 인간갑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염원하며 개인의 안위를 추구하지 않았고 조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았던 그 분들. 사상과 이념을 떠나, 어찌 그들의 삶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고단에서 바라 본 지리산 능선. 남부군의 고향이다 / ⓒ조성봉 적당한 타협을 거부하며 희생 택한 꼿꼿한 정신
'빨치산의 딸'은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은 그 시대 역사의 기록물이다. 나은 세상을 바란 그들은 그 신념 때문에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을 거부한 채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다. 방식과 형식은 달랐지만 올바른 사회를 향한 사람들의 열정은 단절된 듯 보여도 실은 사상을 뛰어넘어 내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진보를 바란 그들의 기본적인 마음과 정신이 4.19 혁명과 5.18 광주항쟁, 6.10 항쟁으로 이어졌음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정신은 지난해 촛불항쟁으로 이어졌다. 세상의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늘 한결같음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치열했던 역사의 기록은 교훈을 남겨준다. 늘 반복되는 듯한 역사는 그 모습이 비슷할 때가 많다. 검찰총장이 말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면서 친북좌익 이념을 퍼뜨리고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표현은 정권의 안위에 급급했던 유신독재 때, 정통성 없던 군사독재 시절, 그리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말살하기 원하던 자들이 늘상 써오던 표현들이다.
역사의 발전을 거부하고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 세력들은 5월 광주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로 몰아붙였다. 87년 6월의 민중들도 사회불순세력의 휘둘리는 사람들로 국가전복세력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는 촛불들도 그렇게 몰아붙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깨어있다면, 꼿꼿하게 살아있다면 어떤 협박이나 압박이 올지라도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은 똑똑히 말해주고 있다. 더욱이 나는 18세 고등학생 나이에 6월 항쟁의 한복판에 뛰어 들어 민중들의 승리를 직접 목도하지 않았던가! 촛불은 당시 내 나이보다도 어린 초중학생들도 나서고 있는 것을.
그것이 일개 소시민인 내가 검찰총장의 말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비웃을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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