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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그때 농촌을 택했던 여대생들은 지금… | 2010/09/20 00:3

운동의 시선으로 본 다큐멘터리 영화 <땅의 여자>





80~90년 대 학생운동을 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학교를 떠나 현장으로 들어갔다. 삶과 운동이 일치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현장은 지속적인 운동을 위해 당연히 선택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다수가 선택한 곳은 노동 현장이었다. 대학을 마친 운동가들은 위장 취업을 했고, 현장 활동을 벌이다 감옥에 간 사람도 있었다. 현장에서 뿌리를 잘 내린 이들은 노동운동을 통해 정치권으로 진출하기도 했으나 끝내 현장에서 못 버티고 나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물론 당시 농촌 현장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노동 현장에 들어간 사람들에 비해 많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브나로드 운동’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1870년 대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은 아쉽게 막을 내렸으나, 1930년 대 우리의 브나로드 운동은 농촌 계몽에 나름대로 큰 성과를 올렸으니까.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고 꽃다운 청춘들은 중년으로 접어들었다. 당시 그렇게 현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직도 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 막연한 궁금증을 영화 한 편이 풀어줬다. 

<땅의 여자>는 당시 농촌을 택한 이들에 대한 후일담이다. 남성이 아닌 여성 활동가들에 초점을 맞춘. 

운동의 진정성을 엿 보게 한 <땅의 여자> 




그들은 지금도 운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 <땅의 여자>가 운동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농촌에서 여성 농민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농촌의 현실이 어떤지를 그들의 생활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들이 어떤 활동가라고 불려 지기보다는 그냥 여성 농민이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처음에는 운동을 위해 농촌을 택했지만 지금은 농민이기에 농민의 권익을 위해 운동에 나서는 것뿐이다. 

영화가 자연스럽게 와 닿았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들에게 ‘농민운동’은 농촌에 살아가고 있음을 내세우기 위한 단순한 치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이상향도 아니다. 그저 생활 속에서 맞닥뜨리는 치열한 현실일 뿐이다. 묵묵히 소걸음처럼 한발 한발 전진하며 그것을 헤쳐 나가는 것이 땅의 여자들의 하루다. 

대도시에서 대학까지 나와 농촌 아낙이 되었건만 농사일이 서툴러 늘 구박 당한다. 그래서 농사일 대신 다른 일을 맡기도 한다. 전업적인 농민운동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땅을 놓으려하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농사를 짓는 것이 농촌에 들어온 처음 생각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운동에는 진정성이 엿보인다. 딱딱한 이론이나 기계적 형식 논리가 아닌, 좌충우돌 주변과 부딪히며 어설프지만 열심히 땅에서 살아가려는 모습에 그들이 선택한 방향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비록 논두렁에 쓰러져 쉼을 청하고, 축사를 짓기 위해 무거운 철골 아시바를 힘들게 옮기고, 때로는 집안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생활을 최대한 재미있게 즐기면서 주변에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려는 모습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운동이 어떻게 가야할지를 이야기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 농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할머니들을 위해 트로트 가요를 가르치고, 얼굴 팩을 해주는 모습에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그들의 운동이 현장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음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이 농민대회 참가가 경찰에 가로 막히자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도 그 앞에서 노래판을 벌이는 여유로 표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진보를 패션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땅의 여자>는 농촌과 거기서 살아가는 농민의 삶을, 일상에서 부닥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재밌게 엮어낸 영화지만, 시민운동과 사회 개혁을 애쓰는 사람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이는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영화가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보여 지는 재미난 다큐멘터리로만 본다면 농민들의 생활을 엿보며 귀농이나 귀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귀농안내센터’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영화는 농촌을 동경하는 사람을 위한 충실한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는 또 다른 모습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현장에 뿌리박은 진득한 운동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해 준다. 역사가 진보하고 발전해 가기 위한 밑바탕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말로만 진보를 외치고 입으로만 변혁을 떠들 뿐 행동은 제대로 못 따라가는, 진보를 형식적인 패션으로 생각하는 외형적 진보주의자들에게, 삶과 운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자세를 이어오고 있는 여성 농민들은 본보기이자 귀감이다. 땅의 여자들 삶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감독과의 대화에 참석했던 어느 수녀님의 말대로 ‘생명’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영화가 안겨주는 색다른 매력이다. 마지막 부분에 송아지가 태어나고, 소희주 씨에게 새 생명이 탄생했음을 알려주는 자막은 결국 이들의 삶이 이어갈 희망과 행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어서다. 

밤 주고, 토마토 주고, 쌀 주고...영화 손해 볼까 조바심 
영진위 탄압 속에 악전고투하는 독립영화 진영의 고단한 현실 

<땅의 여자> 주연 강선희 씨



“이 영화 때문에 배급사가 손해 보면 안 될 텐데… 영화가 어떻게 손해는 안 볼 것 같나요?” 


<땅의 여자> 주인공 강선희 씨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주로 하는 질문이다. 도시여자로 살다가 여성 농민으로 변한 그에게 영화에 대한 고민은 성공여부 정확히 말하자면 ‘손해 봐서는 안 되는 데’로 모아진다. 

제작비가 부족했던 감독에게 돈까지 빌려줬던 그는 독립영화 형편이 농민들보다 못하다며 개봉을 앞두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감독과 배급사 관계자들에게 고기까지 사 먹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자신들의 영화가 남에게 피해나 주지 않을지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다. 농촌 사람들의 순박성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다른 출연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따른 출연료나 이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을 찍기 위해 2년을 고생한 감독과 배급사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 많은 눈치다. 영화제들을 통해 첫 상영이 이뤄졌을 때 관객들에게 밤을 갖다 주고, 토마토를 안겨주기도 했던 것도 다 그런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들은 최근 쌀까지 내 놨다. 관객 1천명이 돌파할 때마다 필요한 곳에 쌀을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독립영화와 농촌을 살리기 위해 짜낸 묘안이다. 가격 폭락이 우려되는 쌀 소비 운동에 동참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개봉한지 1주일만인 지난 16일 누적관객 1000명을 돌파하면서 이들이 기증한 쌀은 관객과 트위터, 블로그 등을 통해 추천된 곳으로 배달 대기 중이다. 

이렇듯 배우들까지 나서 영화에 마음을 졸이고 있지만, 영화 속 여성 농민들이 농촌에 안착하기 어려운 만큼이나 이들을 담은 영화 또한 발걸음이 더디기만 하다. 개봉의 출발선은 넘었으나 영화진흥위원회(조희문 위원장)의 독립영화 억압정책에 개봉관도 줄었고, 상영 여건 역시 열악하기만 한 환경 때문이다. 

홍보물 비치 안 하고 퐁당퐁당 상영 기본...만명 돌파하면 흥행성공 


독립영화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권우정 감독


지난 6일 배급사 시네마달의 한 관계자는 무척 기분이 상해있었다. 극장에 홍보물 비치가 제대로 안 돼 있다는 제보를 받고 전화로 요청했더니 극장 측이 황당한 답변을 해 와서다. ‘개봉작이 많아서 모든 개봉영화 전단을 비치할 수 없다’는 것. ‘홍보물 비치는 당연하고 기본적인 거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그건 의무가 아니다’라는 답변이 되돌아 왔다.
 

이 관계자는 “비용 들여 인쇄한 전단, 꼬박꼬박 2천부씩 보내는데, 홍보물 비치조차 제대로 안 되는 현실이 무척 화가 난다”고 했다. 독립영화로 제작되는 작은 영화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밖에 안 들었다고 한다. 

영화가 전국 20개관에서 개봉을 했다고 해도 하루 종일 한 작품만 상영하지 않는다. 2~3작품을 돌아가며 상영하는 ‘퐁당퐁당 방식’이 많고 하루 1번만 상영되는 극장도 수두룩하다. 가장 많이 상영되는 곳도 하루 3회 정도에 불과해 독립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업영화처럼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그러다보니 독립영화는 관객 1만 명만 넘으면 흥행작품으로 등극한다. 1000만을 동원하는 상업영화가 나오는 현실에서 그 0.1%만 도달해도 흥행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셈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대상,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고, 작품성과 재미를 인정받은 <땅의 여자>지만 현실의 장벽은 높기만 한 것이다. 그것도 추석 연휴 관객들이 많지 않으면 바로 내려져야 하는 것이 독립영화로서 갖는 슬픈 현실이다. 

추석 연휴, 독립영화를 보기위해 상영관을 찾는 관객들이 많아진다면, 자본과 권력의 압박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독립영화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