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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생각하며

전쟁범죄 반성않는 일본과 난징대학살 영화 | 2014/02/01 23:00

진링의 13소녀 포스터




난징대학살을 주제로 한 영화는 늘 끔찍하다. 잔인했던 상황이 묘사될 수밖에 없기에 마음 졸이면서 보는 것은 기본이다. 그럼에도 장이모우의 <진링의 13소녀>를 봤던 것은 난징을 다뤘던 다른 두 영화와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루 추안의 <난징 난징>과 플로리안 갈렌베르거의 <존 라베>는 똑같은 난징을 그렸지만 방향은 조금씩 다르게 잡은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위안부 문제 등도 응축돼 있어 막연한 이웃 나라의 사례로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난징 난징>이 학살의 도시를 흑백화면으로 처절하게 묘사했다면 <존 라베>는 외국인으로 학살의 현장에서 안전구역을 만들었던 독일인 존 라베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그렇더라도 난징을 공간으로 한 이상 학살의 장면을 피해갈 수 없다. 잔인함의 묘사가 더 하느냐 덜 하느냐의 차이 뿐이다. 

영화 '존 라베'의 한 장면



<진링의 13소녀> 역시 마찬가지다. 난징의 수녀원을 배경으로 그곳을 어떻게 든 탈출하고자 하는 미국인과 수녀원 학생을 그렸지만 난징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들은 빠짐없이 담겨 있다. 무차별한 양민 학살과 일제의 극악무도한 만행이 빠질 수가 없다. 

성당 소년의 안내에 따라 수녀원으로 돌아가려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일본군의 총칼은 사정없이 그들을 향한다. 살육의 현장에서 모두가 무탈하기는 난망한 일이다. 그렇다고 성당 안이라고 해서 안정하지도 않다. 잔인한 일본군들은 안전구역으로 설정된 곳까지 무력화 시킨다. 

꽃다운 학생들이 성당 안에 난입한 악마의 마수를 피해 목숨 걸어야 하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움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짐짓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일본군 장교도 있지만 겉모습뿐이고 그 역시 양의 탈을 쓴 늑대에 불과하다. 수녀원의 여학생들을 일본군 연회장에 끌고 가겠다는 생각은 신부가 아무리 사정해도 완고할 뿐이다. 

'진링의 13소녀'의 한 장면




홍등가의 여인들이 성당으로 피해 오면서 성당의 수녀원 학생들과 묘한 갈등이 생긴다. 함께 있기에는 불편한 존재들이지만, 위급한 순간 서로는 서로를 구하는 존재가 된다. 미국인 장의사는 위기의 순간 신부가 부재한 성당에서 신부 역할을 맡는다. 외국인 신부는 그나마 난징의 학생들이 기댈 언덕이다. 

닥쳐오는 위기 속에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은 긴장감이 팽배될 수밖에 없다. 죽음의 도시를 살아서 나가려는 계획. 모두가 다 살아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장이모우의 <진링의 13소녀>는 난징의 공포와 긴장감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앞선 작품인 <난징 난징>이나 <존 라베>보다는 온화하게 만든 느낌이다. 물론 상대적으로다. 학살의 도시 난징의 아픔을 직설적으로 그리는 것은 관람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심적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그 처참했던 현실은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다. 

'난징난징'의 한 장면




요즘 들어 이 영화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학살자들의 보이는 반성 없는 행동 때문기도 하다. 수많은 양민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고, 젊은 여성들을 유린한 일본이 보이는 태도는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범을 합사한 신사를 참배하고, 일본군 위안부 존재를 부인하며, 우국지사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떠드는 행동은 한마디로 적반하장이다. 일말의 양심마저 저버리는 몰상식한 행동은 역사의 책임을 부정하려는 그들의 술수가 묻어난다. 무라야마 담화의 계승을 말하면서 핵심인 식민지배와 침략은 쏙 빼놓고 이야기 하는 아베의 행동은 꼼수일 뿐이다. 

반성 없는 일본의 행태에 분노하는 것은 피해자들로서 당연한 권리이다. 난징 대학살은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반인간적 만행의 한 부분이지만, 우리 역시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하고 엄청난 고난을 겪었기에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꼭 챙겨 봐야할 작품들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진링의 13소녀>는 개봉관에서는 내려졌지만 온라인 다운로드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