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매산 자락에서 치러진 농사꾼 부부의 혼례/ⓒ청년생명평화 자람 지난 12일 경남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 자락 아래 한 초등학교에서 전통혼례가 치러졌다. 귀농한 두 젊은이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신부와 잘 아는 사이기에 가봐야 할 결혼식이었지만 신부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신부의 요청은 '인터뷰 및 사진 촬영 절대 불가!.' 우습게도 오직 나에게만 적용되는 조치였다.
수개월 전부터 참석을 계획했던 결혼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부의 요청을 놓고 고민하다가 나중에 개인적으로 그들 부부를 만나기로 하고는 황매산으로 갈 계획을 접어야 했다. 참석하게 되면 당연히 카메라를 가지고 갈 것이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런 인터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하나의 기사로 만들고자 계획했던 부분인지라, 신부의 요청이 외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와의 인연과 '사진 촬영 불가'의 연유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물 아홉, 서울내기 두 처녀의 귀농

마을에서 바라본 황매산 자락/ⓒ청년생명평화 자람 2007년 3월. 서울에서 합천으로 귀농한 두 처자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기사 제목이 '스물 아홉, 서울내기 두 처녀의 귀농'. 서울에서 좋은 학교를 나오고 안정된 직장을 다녔으나 단조로운 삶에 싫증을 느낀 두 처녀가 귀농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4월의 신부가 된 사람도 당시 이 두 처녀 중 하나였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 소식을 듣게 됐고, 한 모임에서 그들을 만나 안면을 튼 후 그들이 살려는 곳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삿짐이 옮겨지던날 두 처자의 지인들에 섞여 귀농의 현장을 찾아가게 됐던 것이다. 그즈음 본격적인 시민기자 활동을 마음먹던 시기였기에 취재하고픈 마음도 생겨났다.
이삿짐과 짐정리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갔던 것인데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한 탓인지 이미 이삿짐은 어느 정도 들어갔고 미처 끝나지 못한 집수리가 한창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지만 두처자는 궁궐같은 집이라며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 귀농을 환영하기 위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과 한데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다 다음날 오전 시간 잠깐 일손을 보탤 수가 있었다. 들어오는 사람은 전혀 없고 나가는 사람만 있는 마을에 두 처자의 등장은 생기를 가져오는 듯 했다. 더구나 두 처자의 귀농을 지원하기 위해 젊은 친구들까지 몰려들었으니...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참 신선한 모습이었다.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실험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귀농을 선택한다는 것이 특별해 보였다.
젊은 처자들의 귀농에 쏠린 방송의 과도한 관심

농사일 나가는 두 처녀 /ⓒ주간불교 그들의 귀농 모습을 있는 그대로 써서 기사로 올렸는데, 주변의 관심이 상당히 컸다. 방송에서도 두 처자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연신 쪽지가 들어왔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주변의 반응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당사자들에게 외부의 반응을 전하니 절대 연락처를 공개하지 말라며 신신당부가 들어왔다.
그런데, 방송이 일을 만들었다. 두 처녀가 귀농과 동시에 마을에서 쫓겨날 뻔했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내가 연락처를 안 가르쳐 주니 기사에 나온 지명을 토대로 그들 나름대로 탐문을 했던 것 같다.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두 처자 주민등록 이전 여부를 확인한 후 사는 마을을 알아내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
갑작스런 방송의 문의에 이런 내용을 몰랐던 이장님이 무슨 일이지 했었나 보다. 그 즉시로 두 처자를 찾아가서는 혼구녕을 낸 모양이었다. 동네로 이사 들어온 사실을 왜 이장에게 알리지 않았냐면서.(마을 대통령 이장님으로서는 방송사의 연락을 통해 마을 소식을 들은게 수치스러웠던 듯 하다.ㅎㅎ)
'귀농을 마치 자랑하기 위해 방송사에 알린 것 아니냐'는 오해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두 처자가 저간의 사정을 잘 설명하고, 이들의 후견인이 마을에 사시는 유명한 농부 시인(서정홍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장님은 오해를 풀게 됐고, 잘 살아보라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두 처자는 하마터면 나 때문에 마을에서 쫓겨날 뻔 했다고 불평하면서도 주변의 많은 관심이 놀라운 듯 했다. 나 역시도 몇 차례 더 귀농과정 이야기를 쓰겠다고 양해를 얻어 놨었지만, 갑작스럽게 겪는 주변의 많은 관심에 조심스런 마음이 생겨났다. 자칫 그들의 이야기를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그들도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지나서 한 매체가 또 한번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느 종교 매체가 온갖 감언이설로 두 처자를 설득해 취재를 한 것인데 내용을 쓸데없이 미화시킨 것이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없는 내용을 지어내고, 속된 말로 소설을 써 놨다는 것이 이들의 불만이었다. 이후로 이들의 언론에 대한 경계심은 내게도 엄격히 적용됐다. 그 사이 많이 친해진 사람들이었기에 내게 강하게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알기에 내 스스로 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 없이 농사만 짓겠다는데 누가 딸을 줄까?
시간이 흘러 한 친구는 서울로 올라왔고 나머지 한 친구는 계속 눌러앉게 됐다. 그러다가 귀농한 청년과 눈이 맞아 완전히 정착하게 된 것이다. 지난해 만나고 있는 동네 청년과 결혼을 생각중이라는 소식을 알려왔기에 나는 결혼에 맞춰 한번만 더 쓰겠다고 부탁했다. 그간 내가 말을 잘 들어줘서인지 웃으면서 쉽게 들어주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방송이 엇질러놨다. 인간극장 팀의 문의에 응대해 준 것이 화근이었다. 지난 10월 쯤 한참 지난 기사에 대해 문의가 들어 오기에 두 처자 중 한 명이 결혼해서 정착하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인데, 이들이 또다시 일을 틀어놨다.
이번에는 다른 방송에까지 정보를 준 모양이었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결혼을 준비중인 처자에게 집요하게 몇 개의 방송에서 연이어 출연을 요청했던 것 같다. 결론은 내게 허용해 주겠다던 취재도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올해 초 결혼식 날짜를 알려온 신부에게 방송사들과 있었던 일을 전해 들으면서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귀농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고 많은 노력과 인내가 있어야 함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데, 부득이 내 취재 계획 또한 접을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올려놓은 사진으로 귀농 처녀의 정착 소식을 전한다. 이전에 썼던 기사에서 이들의 뒷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했기에.
신부에 따르면 결혼과정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멀쩡한 딸이 시골에서 살겠다고 해서 잠시 그러다 말겠지 했다는데, 결혼까지 해서 눌러않겠다니 부모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한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통해 "특별한 벌이도 없으면서 죽을 때까지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사람에게 요즘 시대 어떤 엄마가 딸을 줄까요?" 라고 푸념했을 만큼, 어머님의 반응이 매서웠고 그런 사람 만날거면 인연 끊자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딸이 사는 마을에 찾아오신 어머님이 멋진 자연에 반하고, 딸이 만나는 청년을 본 순간 피식 한번 웃으면서 모든 일은 손쉽게 해결됐다고 한다. 딸과 같은 사람이 또 한 명 있다는 느낌을 받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렇게 원하던 시골에 정착하게 된 것에 신부의 표정은 화사하기만 했다. 청명한 날씨, 마을 잔치가 된 결혼식 모습에 땅을 통해 얻는 젊은 귀농자들과 그 이웃들의 행복이 담겨 있었다.

평생 땅과 함께 살겠다는 농사꾼 부부/ⓒ청년생명평화 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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