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상평전1 - 프롤로그
'태백산맥에 눈 나린다'... 남부군과 이현상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
'태백산맥에 눈 나린다' /노래 기타 권택중. 대금 최연정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 남부군 기관지 '승리의길'/ⓒ진달래산천 조성봉
[지리산 유격대에서 남부군으로] 남부군이 남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1950년 11월이었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전선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지리산유격대라 불리던 그들은 피난민들과 함께 북상 중이었다. 한참을 후퇴하던 그들은 강원도 후평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나타난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과의 만남은 지리산 유격대의 전환점이 된다. 유격대를 지휘하던 이현상의 친구이자 북한 정권의 요직을 맡고 있던 이승엽은 후퇴하던 유격대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고, 그 명령에 따라 그들은 다시금 전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이었다. ‘남부군'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진 것도 이 때였다. '조선인민유격대 산하 남반부 인민 유격대'. 남부군의 공식 명칭이었다. 총사령관은 이현상 선생. 구례 간전 출신의 박종하가 참모장을 맡았고 김일성대 출신 차일평이 정치위원이었다. 태백산맥을 따라 남으로 긴 행렬이 형성됐다. 대열을 정비해 오던 길을 되돌아 남하하는 길, 동해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정상에서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노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빨치산들이 군가처럼 부르던 노래, 김순남의 <태백산맥>이었다. 태백산맥에 눈 나린다. 총을 들어라 출정이다 눈보라가 밀림에 우나 가슴속에 피 끓는다. 높고 높은 산을 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을 내린다. 원쑤를 찾아 영을 내린다.♬ 노래 소리는 길게 메아리 되어 퍼져나갔다, 살을 에는 추위와 세찬 바람 속의 행군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결연하기만 했다. 그들의 마음에는 분명 희망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세상, 차별 없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작은 희망이 고된 나날 속에서도 싹트고 있었다. 태백산 정상에서 묵은해를 보내는 그들에게 멀리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은 특별하게 생각됐는지도 모른다. 48년 10월 여순병란이후 내내 산에서 살았던 이현상 마음에도 아침 태양의 찬란한 빛이 비쳐왔다. 패잔병으로 북상이 아닌 정식 유격대로 남하하는, 180도 바뀌어 진 상황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비록 앞날에 벌어진 상황은 그 기대와 달랐지만 눈발 날리는 능선을 따라 걷고 또 걷던 순간만큼은 그에게 희망만이 있음은 분명했다.
■ 이현상평전2 - 1년 만에 쓰게 된 뒤늦은 후기
무분별한 양민 학살을 죄악으로 규정한 온정주의자 2007년에 출간된 <이현상평전>
[책으로 만난 혁명가] 이현상. 그의 궤적을 쫓게 된 것은 지난해 초였다. 작가 안재성이 쓴 <이현상 평전>은 2009년의 시작과 함께 손에 잡고 독파한 책이었고, 다 읽고 나서도 틈틈이 읽은 책을 뒤적거리며 내내 그들의 삶을 곱씹어봐야 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빨치산들의 삶은 한 번 읽고 지나칠 만큼 단순치 않았고, 무언가 깊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같은 주제의 책인 <남부군>과 <빨치산의 딸>을 곁들여 정독했던 것도 그런 이유 탓이었다. 뭔가 읽은 느낌을 써야 하는데 쓸 말이 많아서인 듯, 1년이 지나서야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은 글로 기록된 그들이 삶이 너무나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2007년 초판이 나온 책을 2009년에 완독하고 그 느낌을 2010년에 정리하는 것이니, 이현상의 산속 생활만큼이나 그의 삶을 반추해 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그 사이 작가 안재성 선생은 최근 <박헌영 평전>을 내 놓았다. 남과 북 양쪽에서 이름 없이 묻혀 진 혁명가들을 복원하는 작업을 펴고 있는데, <이현상 평전>도 그런 과정의 하나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쳤지만 오명을 쓰고 남북 양측에서 죄악시되어 버린 자들. 그런 역사적 미아들의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은 것이 작가가 인간적인 이현상을 바라보려고 했던 소박한 마음이었다. 안재성 작가는 이현상을 우리 현대사가 외면한 세계적 민중 혁명가라고 표현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 까지 민족의 독립과 계급해방을 위해 투쟁한 그에게 가장 알맞은 표현이리라. 냉철한 이론가요 투쟁가이기도 했지만 혁명가 이현상은 그러나 상당히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여순병란은 당적 죄악이다”...그러나 책임을 떠안다
때로 온정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어야 할 만큼 그의 정 많은 성품은 빨치산을 이끄는 주요한 바탕이면서 때로는 비판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과보다는 공이 많다고 보는 것이 작가의 시각이었으니, 혼란의 와중에 좌우익이 서로에 대한 보복을 서슴지 않을 때 적어도 이현상은 자신의 권위로 그것을 비판하고 막아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48년 국군 14연대가 일으킨 여순 병란을 이현상 선생은 봉기가 항쟁이 아닌 ‘당적 죄악’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당의 지침 없이 즉흥적으로 일을 벌려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것과, 결국은 동지들까지 죽게 만드는 과오를 범한 것은 엄연한 죄악으로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당사자들은 징벌을 받아야 할 처사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현상 선생은 책임을 떠안아야 했다. 비판은 했으나 보듬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병사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빨치산 활동 과정에서 이현상 선생은 이유 없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포로들에게 차비까지 주며 돌려보냈고, 무고한 양민들의 피해를 줄이려고 애썼다. 이렇듯 인정을 베푼 덕에 보이지 않게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현상의 흔적을 더듬으며 쫓아다니자 결심한 것도 이런 사실 때문 이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온정주의로 몰리는 비판의 원인이 됐고, 이현상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는 근원이 되기도 했다. 사람을 아끼는 따뜻함이 배신과 도망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자신을 곤경으로 몰아넣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 이현상평전3 - 그가 걸었던 삶
구속·퇴학·수감·도주...순탄치 않았던 생활
지리산 / ⓒ진달래산천 조성봉
[역사의 굴곡을 떠안았던 생애] 이현상. 1905년 금산의 양반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일병탄으로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고난의 삶을 살아야했다. 20대 초반의 나이,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해 구속과 퇴학을 당해야 했고, 동맹휴학과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도하다 잇따른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경성콤그룹의 일원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으며, 반복되는 고문과 투옥 속에 건강을 상하기도 했다. 병보석으로 석방되지만 재수감을 거부하고 도망쳐서는 해방될 때까지 일제에 맞섰던 그의 삶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해방 후 둘로 갈린 조국에서 남로당의 핵심이었던 그는 여순병란이 발생하자 하동 악양에서 순천으로 들어갔고 순천역에 14연대 병사들을 만나 지도하게 된다. 이후 토벌대의 공세를 피해 지리산에 들어가며 본격적인 빨치산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삶은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나 늘 고통의 연속이었다. 산 속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늘 배가 고파야 했고, 끊임없는 추격 속에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절묘한 줄타기가 이뤄지는 나날이 이현상의 삶이었고 그를 따르던 빨치산의 삶이기도 했다. ‘남부군’이란 이름으로 그는 수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53년 체결된 휴전협정에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과 북 모두 그들을 거론하지 않았다. 남한의 빨치산들은 북에서 마저 버림받은 모양새가 된 것이었다. 고립무원의 산에 갇혀 있는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잡히느냐 아니면 싸우다 죽느냐 오직 두 가지.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히지 않는 한 전투 중 맞아 죽거나, 추위에 얼어 죽거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것이 빨치산의 운명일 뿐이었다. 끝없는 고통 속에 굽히지 않았던 정신 영화 '남부군'의 한 장면
미군의 세균전과 네이팜탄 공격, 강력한 국군의 동계 대공세 속에 산을 누비며 게릴라전을 펼치던 빨치산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갔지만 그의 투쟁은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혹한의 추위 속, 휘몰아치는 지리산의 눈발을 헤치며 살기 위해 도망 다녀야 했던 혁명가는 흔들림 없이 대원들을 독려했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에서도 끝내 굽히지 않았던 그의 정신은 계속되는 굶주림과 손과 발이 썩어 들어가는 추위 속에서도 항상 그대로였다. 나이 지긋한 그는 남부군 총사령관으로서 의연하게 전사들을 독려하며 산 중의 고통을 감내해 나갔다. 토벌대의 공세를 피해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지는 그늘진 곳에서 하루 온종일 숨죽이며 웅크린 채 고통을 참아내던 그들은 쉴 새 없이 손과 발을 움직이며 동상을 막아야했다. 숨 돌릴 틈 없이 쫓기고 쫓기다 잠시 쉬는 사이, 맥이 빠져 조는 모습으로 동지들과 작별인사도 없이 영영 이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잠시 언 몸을 녹이려다 토벌대의 표적이 된 빨치산들도 있었다. 광활한 지리산도 겨울에는 그저 너른 무덤일 뿐이었다. 국군의 동계 대공세는 빨치산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고 있었다. 지리산이 아무리 크다 해도 반경 50km의 고립된 공간이었다. 미국과 싸우던 베트남 유격대는 하노이로 부터 보급을 받았고, 독일과 싸우던 러시아 유격대는 트럭으로 물자를 보급받아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중국공산당이나 항일 유격대는 농사까지 지으며 싸울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 유격대는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아무리 깊은 골이라도 반나절만 걸으면 마을이 나오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깊이 숨어도 국군이 반나절만 밀고 오면 드러나 버리는 손바닥만 한 지역에서 이러 저리 토끼몰이를 당하며 죽어가는 처지였다.
-<이현상 평전> 중 ■ 이현상평전4 - 이현상을 기억하며
“사람들은 모른다. 체게바라는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북한에 있는 이현상 가묘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혁명가 이현상에게 먹구름같은 결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북에서 뒤늦게 도착한 지침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북으로 향하던 상선 연락대가 모두 전멸했다는 소식이 오고, 계속된 공세에 세가 급격히 약화된 상황에서 이현상에게 다가오는 운명 또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하기만 했다. 북에서 들려오는 남로당 숙청의 영향은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을 급전직락 시켜 평당원으로 바꿔 놓는다.
그리고, 1953년 9월 17일 밤 8시경. 빗점골 합수내 부근에서 토벌대에 의해 그는 혁명가의 삶을 마감한다. 평생을 힘들고 어려움 속에 오욕의 세상과 맞서온 혁명가의 최후는 어찌 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고 비극적이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에서 남과 북 어느 쪽도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처지는 못 됐을 것이었다. 남에서는 빨치산의 수괴였고, 북에서는 그의 동료들이 모두 숙청당한 상태였으니 설사 그가 북으로 갔다고 해도 순탄한 삶이 될 가능성은 낮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그가 더 이상 도망 다니느니 보다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마지막까지 싸우다 최후를 맞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한시도 굴하지 않고 시대의 맞서 왔던 그의 삶은 조국의 분단 속에서 외롭고도 고난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편할 수 있던 굴종의 삶을 늘 거부했다. 그가 편함을 몰라서였을까? 그 보다는 자기 양심과 신념에 따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제에 강점된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이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평등한 세상을 건설해보겠다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 태백산 정상에서 새해 일출을 바라보며 다짐했을 그 희망을.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한 시대의 혁명가를 기억하며
글로 표현된 그의 궤적을 따르며, 이현상 선생이 삶을 반추해 보면서 그저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한 인간이 시대를 살 수 있는 방법은 다양했다. 굳이 나서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고, 대충 굽히고 산다면 험난한 길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살았던 그의 삶은 신념과 사상 때문에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해 냈던 것이다. 그 시대나 지금 시대나 세월의 흐름만 있을 뿐, 큰 줄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고 역사의 순환은 반복되고 있었다.
고난 속에서 험한 삶을 마감했던 혁명가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선생. 비록 남한에서는 반란 지도자로 적장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는 한 시대의 혁명가를 이렇게도 기억한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뚱, 호치민, 티토, 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게바라를 넣어서 위에 든 반제국주의 혁명가들은 모두 혁명에 성공해서 자신들이 꿈꾸었던 새 세상을 열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그 꿈을 펼쳐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그의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모여 만들었던 남조선노동당이 사라지면서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돌아가신 뒤에도 그 넋이나마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지리 큰 뫼 건공중을 떠도는 중음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현상 평전 - 김성동 발문 ‘남로당을 위한 변명’> 중 ■ 이현상평전5 - 에필로그
'이현상, 내 마음 속의 빗점골' 지리산 빗점골 2008년 이현상 선생 기일에 / ⓒ진달래산천 조성봉
[선생님으로 불린 빨치산] 한일병탄 100년, 한국전쟁 발발 60년. 그 시공간을 관통하며 일제에 맞서 거세게 싸웠던 항일 운동가는 분단의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반대편에 섰다는 사실 때문에 붉은 줄이 그어졌고 오랫동안 언급하기 어려웠던 인물이었다. 도리어 만주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던, 그리고 빨치산 토벌에 혁혁한 전과를 세운 자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훗날 역사는 이들의 삶을 다시금 평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일 투사요 혁명가였던 이현상을 평가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역사에 흐름에 각인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것이 <이현상 평전>이 남겨주는 여운이었다. 반란의 무리요 도적떼에 불과했던 임꺽정이, 홍경래가, 동학혁명이 다시 평가되듯이. 작가가 이현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박영발과 방준표 등을 교조주의자로 상대적으로 비판적 관점에서 기록했지만, 체제와 이념을 넘어 그들의 삶이 지향했던 순수한 가치만은 어디서든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책에서 남는 아쉬움이었다. 비서이자 간호사였던 하수복과의 정교 관계를 맺고 아이까지 갖게 한 것은, 지도자로서 강조한 규율을 깬 처사였기 때문이다. 허나 끝내 입을 다물고 작가에게 아무 말도 안 했다는 하수복 선생이 궁금했다. 수 십 년의 세월을 마음으로 간직한 채 살아 온 여인의 한이 그 무거움 침묵 속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기리며 흐느끼던 두 빨치산 이현상 선생 영전의 옛 남부군. 최순희 선생과 이옥자 선생/ⓒ진달래산천 조성봉
2009년 9월 17일 빗점골 합수내. 이현상이 삶을 마감한 곳에 어김없이 두 명의 빨치산들은 선생님을 부르며 흐느꼈다. 그 전 해에도, 그 전전 해에도 잊지 않고 그 자리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부축을 받고 간신히 오를 만큼 힘든 몸이지만 옛 사령관을 잊지 않고 제를 올리는 두 빨치산의 모습에 그들의 지향했던 가치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혁명가는 그렇게 기억되며 기려지고 있었다. 이현상 선생님. 총사령관도 아닌 동무도 아닌 이현상을 부르던 그들의 호칭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선생님’이었다. 이현상, 내 마음속의 빗점골
내 마음속의 지리산 빗점골 어느 모퉁이엔가 웅크리고 앉은 사람 성큼성큼 검은 산으로 들어간 산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검은 산 지리산 그 아래 아카시아 뿌리 내린 돌무덤속 하얀 발가락 마디마다 꿈꾸는 별 절망하거나 다시 절망할 때 혁명의 날개를 잃어 가 닿을 수 없는 독백들이 끝내 바둥거리다 곤두박질 치는 지점마다 지고 또 피는 홀아비바람꽃들 고단한 분단 반세기의 표류 속에서 끝내 서러운 꿈 하나 낚아 올릴 수 없는 밤 별의 꼬리를 부여잡고 한없이 꿈틀대며 승천하는 내 남루한 기억 속의 빨치산 지금 여기는 어디 쯤인가 언제나 혁명을 꿈꾸면서도 지순한 노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지금 눈물 속으로 다시 눈물이 고여 오고 허물을 벗겨 보면 다시 허물이 도사리는 지금 여기는 어디 쯤인가 곳곳에 하나씩의 비밀 아지트를 남겨 두고 모두들 살해당한 지리산 빗점골 그곳에서 나는 무련, 그대를 만난다 도리어 새장 밖으로 갇혀 있는 세상을 위해 새장 속의 새는 결정적으로 날개를 버린다 무덤 밖으로 묻혀 있는 세상을 대신해 잠들지 못하는 주검의 두 눈에도 마침내 눈물이 흐른다 비틀거리는 나의 그림자를 밟으며 바짝 뒤따르는 음울한 바람의 눈초리 그대 이십세기의 꿈은 새로워지는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하늘은 이내 무너져 내리고 내 회상의 지리산 빗점골 어느 모퉁이엔가 웅크리고 앉은 산사람이 더 깊이 고개 숙이는 늦가을 저녁 무렵 뜨거운 나의 이마를 떠나 끝없이 질주하는 한줄기 별빛 나는 정녕 나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나는 정녕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는가 여태 매듭 하나 풀지 못한 예지의 더듬이를 보듬고 여백으로 비워둔 내 오랜 잠의 속살 그 속으로 수많은 잔뿌리를 내리며 먼저 나무처럼 굳게 서는 법을 배우며 뒤늦게 빨치산 위령제를 올린다 그대 산사람의 타는 듯 메마른 입술 사이로 한국 현대사의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도 내 심장의 자물쇠를 잠근다 열쇠를 버린다 산 너머 산이 있고 바람의 끝에서 다시 바람이 분다
시 / 이원규 지리산 빗점골 이현상 /ⓒ진달래산천 조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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