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의 우리집 태백 예수원 | 2008/12/28 13:30
1년 만에 집에 다녀왔다. 지난해 연말에 갔다 왔으니 정말 딱 1년 만이다.예전에는 틈나는 대로 잠깐식 다니러 갔었는데, 올해는 촛불 때문에 거의 가보지 못했다. 간만에 할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서울을 떠나 태백으로 향했다. 태백. 집에서 살다 나온 이후로 지난 10년간 늘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찾아가던 곳. 언제나 편안함을 안겨주는 곳이다. 아늑함과 포근함도 함께. 강원도로 들어서며 차창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가 차갑다. 집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듯 햇다. . 수년간 이어 오던 도로 확장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듯, 꼬불꼬불 길이 쫙 펴 있었고, 마무리 작업 중인 사북쪽만 빼고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피재를 넘어 10km정도를 더 달렸을까 상사미를 지나 하사미에 다다르니 우리집 입구가 보였다. 예수원. 간판만 봐도 반가웠다. 오르막길을 걱정했는데, 다행히 며칠전 내린 눈이 많이 녹아 있었다. 외나무골 골짜기로 1km정도 들어가야 하는지라 눈이 많이 내리면 차가 올라가기 어려운 여건. 바퀴가 겉돌며 미끄러지는 곳이 있었지만 무난히 마당에까지 들어설 수 있었다. 외나무골의 수도원 공동체 예수원
예수원은 수도원 공동체로 내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대천덕 신부님에 의해 1965년 세워졌다. 가족과 개인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체다. 4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고 적을 때는 50명 정도가 많을 때는 7~80명 정도가 이 집에서 함께 산다. 길지는 않았지만 그 집에서의 살았던 시간은 내게 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멋진 할아버지와 함께 아름다운 집들이 모여 있는 산속에서의 삶. 지금도 내가 예수원 가족이 됐고 그 집을 우리집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게 생각된다.
"집에 오셨네요. 멀리서 왔다갔다하기 불편하지 않아요. 다시 들어와 살아야지요?" 그러면 나는 씨익~ 웃고 넘겼다. '내가 들어오면 밖에 일 처리가 제대로 안되기에 못들어온다'고 말하면서. 10년 동안 우리 집의 외부 일은 나의 일이기도 했다. 가족들의 경조사를 포함해 밖에서 해결돼야 할 일들은 많은 부분 내가 맡아야 할 몫이었다. 우리 집은 일년에 1만명 정도가 방문하는 곳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동체로 소문나 있어 외국에서 오는 분들도 적지 않다. 이 집의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숙소 상황에 맞춰 손님들의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특히 숙식이 무료로 제공되다 보니 방문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 손님 접대는 이곳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다. 수도원 공동체인 예수원은 노동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곳이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하루 세번의 예배와 노동이 이 곳 생활의 중심이다. 한편으로 안식처 역할도 한다. 예수원 홈페이지 참조 방문한 손님들은 일과에 따라 작업에 동참하는 분들도 많지만 조용히 쉬다가 가는 분들도 많다. 산비탈을 개간해 갈대 지붕이 얹혀진 집들은 매우 운치있다. 백두대간 바로 아래쪽에 있어 20분 정도 산으로 올라가면 등산로와 만난다. 외부 손님들은 토일을 빼고는 언제든 방문할 수 있지만 오려는 사람들이 많아 선착순으로 예약을 받고 있다. 특히 학교들의 방학 기간 중에는 보름 또는 한달 전에는 예약해야 원하는 날 갈 수 있을 정도다. 숙소와 식사준비로 인해 예약없이 방문하는 손님들은 받지 않는다. 기본 2박3일간만 있을 수 있고, 금요일에 올 경우는 토요일에는 무조건 내려가야 돼 1박2일 밖에는 머물지 못한다. 토요일과 주일은 이 집에 사는 식구들이 쉼을 얻는 시간. 외부손님들은 방문할 수 없지만 나같은 가족들은 예외다. 사실 크리스마스도 진작에 예약이 완료돼 갈 수 없는 형편. 하지만 난 가족이 아니던가! 며칠 안 남기고 전화했음에도 특별히 뭐라하지 않고 흔쾌히 오라는 반응이다. 그래서 가는 데 지장이 없었다. 1년 만에 가서인지 다들 너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짧게 다니러 왔다고 말했더니 서운하다는 듯 며칠 더 쉬었다 가라신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여건이 간단치 않다. 모처럼 들어선 집, 날씨는 추웠지만 맘이 편안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멀리사는 가족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나 역시도 오랜 만에 보는 가족들이 반가웠다. 손을 꼭 잡으며 반겨주신 제인 할머니
미사가 끝나고 바로 이어진 아침 식사. 간만에 집을 찾은 가족들이 상차리는 손길을 돕기에 바쁘다. 소박한 상이 차려졌고 식구들과 가족들, 손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둘러 앉았다. 우리집은 하루 3끼를 모든 가족들이 방문한 손님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 먹는다. 식사시간을 못맞추면 굶어야 한다. ㅎㅎ크리스마스여서인지 평소 풀만 무성한 식탁이 윤기가 흘러 보였다^^ 식구들의 생일날이면 생일상이 마련되고 케이크가 들어오는 데, 이날도 케이크가 준비됐다. 오늘 생일의 주인공은 예수님^^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케이크가 제단 앞 말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 모형 앞에 놓여졌다.
우리집의 가장 큰 어른이신 제인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셨지만 건강해 보였다. 제인 그레이 토리.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든든한 조언자였고 동반자였다. 우리 집의 상징과 같은 분이다. 집에 왔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반가이 맞아주셨다. 늘 나만 보면 이전에 할아버지 입원했을 때를 이야기하시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 내 손을 꼭 잡으시며 그 때 정말 고마웠다고 또 이야기 하신다. 한국에 40년이 넘게 사셨지만 할머니는 한국말을 잘 못하신다. 어눌한 몇마디 외에는. 예전에 한국말 실력이 약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웃음거리가 됐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한국말을 어렵게 생각해 잘 배우지 않으신 듯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머니가 한국말 못하는 것을 불가사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서툰 발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병원 있을 때 정말 간병한다고 고생했는데... (그때)할아버지 간호 잘해줘서 고마웠어요." 나는 할머니를 안아드리며 "건강하셔야 해요. 오래오래 사세요"하고 말씀드렸다. 내 말을 알아 들으신 할머니가 웃으면서 짧게 끊어지듯 답변하셨다. "감.사. 함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식구들과 가족들 그리고 우리집을 찾은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양말선물이 주어졌다. 양말안에는 수첩 및 손수건, 미니 후레쉬 먹을 것 등이 담겨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준비한 것들이다. 크리스마스에 양말선물을 주는 것은 예수원의 전통이다. 당일 온 사람들 모두에게 다 준다. 초창기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함께 살던 가족들을 위해 선물하면서 시작됐다고 들었는데, 그 이후로 한해도 빠짐없이 선물이 나눠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할머니가 준비한 작은 선물에 모두가 미소짓고 있었다. 교회와 세상을 향한 그들의 기도 12시 정각. 하루 세번 울리는 삼종이 울리고 중보기도가 시작됐다. 이 시간은 오로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기도만 하는 시간. '대도'라고도 불린다. 예배실에 모인 이들은 기도문이 읽어질 때마다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를 반복하며 세상을 향해 그리고 남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교회개혁과 토지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곳 답게 기도문 곳곳에 교회와 사회가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 대천덕 신부님이 그리웠다.
예수원 들머리에 서면 커다란 돌비석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예수원의 정신과 같은 문구가 새겨 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님은 토지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분이었다. 땅투기는 잘못된 것이며, 땅을 독점해서는 안된다고 생전에 줄기차게 외쳐댔다. 토지공개념, 종부세, 부동산 규제 강화 주장 등은 모두가 대신부님의 생전 지론과 연관이 깊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 운동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예수원을 기독교적 영성을 추구하는 곳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토지 문제나 경제 정의, 사회가 바로 서는 문제 등도 똑같이 중요시 한다. 교회가 바로서지 않으면 사회가 혼탁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할아버지가 평소 자주하신 말씀이었고, 지금 현실을 봐도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돌비석은 내가 집에 살던 때 세워졌으니 10년이 됐다. 예수원에 들어설 때 처음 마주하는 문구라는 것은 그 중요성이 얼마나 큰 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집을 나서며 서울로 되돌아오며 할아버지 모습이 회상됐다. 미국인이었지만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의 전통을 존중했던 할아버지. 판소리를 좋아하셨으며 국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셨던 대천덕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는 국악 찬양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참 좋은 분이셨고 훌륭한 분이셨는데, 아직도 할아버지의 체취는 이곳 저곳 깊게 남아 있었다. 세상이 시끄러워 앞으로 4년간은 찾기 힘들 것 같다고 말하고 왔는데, 간만에 찾은 집은 언제나 내게 큰 힘을 안겨주는 듯 했다. 대천덕 할아버지의 여운이 길게 느껴지면서... |